[도전의 서사] 파블로 피카소, 세 번 죽고 다시 태어난 사내
파블로 피카소, 세 번 죽고 다시 태어난 사내
“나는 어릴 때 미켈란젤로처럼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처럼 그리는 법을 잊는 데 평생이 걸렸다.”
파블로 피카소.
그의 이름은 ‘천재’와 동의어처럼 쓰인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건,
그는 단 한 번도 안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걸어온 길은 단순한 명성과 돈의 행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이 만든 성공을 스스로 파괴하고,
그 폐허 위에서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절박한 감정’과 ‘무너질 듯한 순간들’이 있었다.
“푸른 시절, 끝없는 상실 속에서 붓을 들다”
20세기 초,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막 이주한 젊은 피카소.
그는 가난했고, 외로웠으며, 삶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절망의 정점을 찍은 사건—
가장 친한 친구 카를로스 카사헤마스의 자살.
예술을 함께 나누던 동료의 극단적 선택은
피카소의 내면을 처참히 뒤흔들었다.
그는 말이 아닌 그림으로 애도했다.
그때부터 그의 작품은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슬픔에 잠긴 노인>, <청색의 자화상>, <맹인의 식사>...
푸른 시절(Blue Period)은
그의 슬픔, 상실, 인간 존재의 허무를
단 하나의 색으로 울부짖은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그는 팔리지도 않는 작품들을 그리며
스스로를 지워나가듯, 그려나갔다.
“모든 것을 다 부숴야만, 내가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피카소는
푸른 슬픔에서 벗어나 다시 인간의 에너지로 향한다.
이후 등장한 분홍 시기(Rose Period)와
곧이어 탄생한 혁신적인 형식, 입체주의(Cubism).
입체주의는 그가 세상에 던진 예술적 도발이었다.
눈에 보이는 걸 그대로 그리던 방식은 버려졌다.
피카소는 말한다.
“사물을 바라보는 데는 수많은 시점이 있다.
그걸 한 순간, 한 화면에 담고 싶었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그 시작점이었다.
당시 미술계는 그 작품을 ‘괴물 같다’, ‘미친 짓’이라 비난했다.
하지만 피카소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를 밀어붙이며 세상의 기준을 무너뜨렸다.
그의 도전은 기술이 아닌 시선의 혁명이었다.
“게르니카, 그는 붓으로 전쟁에 맞섰다”
그에게 가장 절실한 순간,
그 절박함이 예술로 폭발했던 순간—
바로 <게르니카>다.
1937년, 스페인 내전 중 독일군이
소도시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했다.
수백 명이 죽었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다.
피카소는 분노했고,
몇 달에 걸쳐 그 거대한 절규를 캔버스에 옮겼다.
<게르니카>는 단지 거대한 벽화가 아니었다.
“나는 이 폭력을 예술로 기억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검은 회색 톤, 비틀린 인물들, 울부짖는 말,
무표정한 어머니가 안고 있는 죽은 아이...
그 모든 디테일은 피카소가 느꼈던 분노, 절망, 책임감이었다.
그는 예술가이기 전에
사회의 목소리이자 시대의 증언자였다.
“피카소는 두려움을 반복해서 이긴 사람이다”
삶의 모든 국면에서
피카소는 새로운 형식을 찾아갔다.
그것은 무의미한 실험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그림이 진짜 나인가?”
라는 질문을 품고 있었다.
수많은 연인과의 관계, 전쟁의 시대, 노화, 상실…
그 모든 순간마다
그는 스스로를 다시 부수고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그림을 그렸다.
그의 마지막 작업은 죽기 전 날 완성된 자화상이었다.
초점 없는 눈, 무채색의 얼굴, 말 없는 시선.
그림은 말했다.
“나는 이제 사라진다. 하지만 나의 도전은 여기 남는다.”
💬 피카소가 남긴 도전의 정의
그는 평생 동안 5만 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건, 그 숫자가 아니다.
그가 정말 보여준 건
“스스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용기”였다.
피카소는 우리에게 말한다.
“도전은 완성된 그림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내 안에서 벌어진 혁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