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의 서사] 장 미셸 바스키아, 거리에서 태어난 저항의 언어
“나는 흑인 예술가가 아니다. 그냥 예술가다.”
1970~80년대 뉴욕.
거리에는 낙서가 넘쳐났고,
도심의 벽마다 그래피티(graffiti)가 새겨지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아이가 있었다.
그는 프랑스-아이티계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년.
언제나 어디서든 ‘소수자’였다.
장 미셸 바스키아는 가난했고, 흑인이었고, 예술계의 외부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현실을 그림으로 반격하기 시작했다.
“글자 같지 않은 글자, 그림 같지 않은 그림.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첫 번째 도전은 이름조차 없는 거리에서 시작됐다.
그는 ‘SAMO’(Same Old Sh*t)라는 태그로
건물 벽에 짧은 문장들을 남겼다.
“신은 돈을 믿지 않는다.”
“플라스틱처럼 미소 짓는 너.”
“영혼 없는 예술은 잊혀질 것이다.”
사람들은 궁금해했지만, 누구도 그게
10대 소년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바스키아는 거리의 감각, 분노, 상처를
붓과 스프레이로 뒤섞으며
자신만의 언어를 만드는 도전을 이어갔다.
“그림 하나가 펀치처럼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1981년, 그는 본격적으로 화단에 입성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갤러리는 그를 ‘힙한 흑인’, ‘거리의 천재’로 소비하려 했고,
그의 예술을 깊게 보려 하지 않았다.
그가 진짜로 말하고 싶었던
정치, 인종, 착취, 계급은
‘트렌디한 그래피티’라는 말에 묻혔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그림은 점점 더 거칠고 더 복잡하고 더 화려해졌다.
그 안에는 흑인 역사, 음악, 문학,
그리고 자기를 끌어올린 거리의 기억이 새겨졌다.
“내 그림은 내가 받은 상처들의 지도 같은 거야.”
“앤디 워홀과의 만남, 그리고 고독의 시작”
예술계의 황제, 앤디 워홀과의 협업은
그에게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안겼다.
한편으론 예술계 입장에서 ‘정통성’을 얻었지만,
한편으론 “워홀의 애완 화가”라는 비아냥도 따라붙었다.
바스키아는 점점 외로워졌고,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에 갇히기 시작했다.
예술은 그에게 자유이자 족쇄가 됐다.
그의 도전은 이제 “무엇을 그릴까”가 아니라
“나는 왜 그리고 있는가”에 대한 싸움으로 변했다.
“27년의 생. 끝내 불타버린 불꽃.”
바스키아는 단 27세의 나이로 요절한다.
약물, 고독, 그리고 세상에 대한 분노.
그 모든 것들이 그를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한 시대의 슬픔과 저항을 증명하는 언어로 남았다.
<Untitled>, <Irony of a Negro Policeman>, <Boy and Dog in a Johnnypump>…
그 그림들엔
“내가 여기 있었고, 나도 세상을 향해 외쳤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 바스키아가 남긴 도전의 본질
장 미셸 바스키아는 천재였지만,
그보다 먼저 고독한 이방자였다.
그의 도전은 화려한 성공담이 아니라
자기를 꿰뚫는 질문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은 사람의 기록이다.
“예술은 거짓을 들춰내는 도끼다.
그림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계속 깨뜨리고 있었어.”
그는 결코 완성되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진짜였기에,
그의 도전은 지금도 캔버스 밖으로 흘러나와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